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25년 객군 반란 (문단 편집) === 양시민과 류전환의 반란 === 1차 동정이 마무리되자 운남군과 광서군은 동강에서 철수하여 광동성 성장 관서, 재정부를 공격하려 하며 난폭한 행동을 벌였다. 이에 3월 20일에 사망한 쑨원을 대신하여 대원수 대리를 맡고 있던 [[후한민]]은 [[쑹쯔원]]과 함께 [[3월 27일]]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하는 한편, 군벌들에게 3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 1. 정부에 절대 복종하라. * 2. 점거한 지방을 내놓고 정부가 지정한 지방에 주둔하라. * 3. 점령하고 있는 재정기관을 반환하라. 하지만 양시민과 류전환은 이를 거부하고 공개적인 반란에 들어갔다. 4월 28일 양시민이 동정전선의 증만종 사단과 4개 독립여단에게 광저우로 돌아오라는 밀명을 내렸고 유지환 부대가 동관을, 료행초 부대가 서관을 점령했다. 양시민 부대도 영한로와 광저우 역을 비롯하여 광저우의 주요 요지를 점령하였다. 양시민은 전계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후한민은 이들과의 타협을 모색하려 했으나 랴오중카이와 중국 공산당은 강경하게 양시민과 류전환의 토벌을 주장했다. 결국 국민당은 토벌을 결정했고 광서군과 운남군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하였다. 1925년 4월 28일, 산터우의 광동군 총사령부 행영에서 총사령관 쉬충즈와 [[황포군관학교]] 당대표 [[랴오중카이]]가 운남군과 광서군 토벌을 논했다. 5월 8일, 베이징에 머물던 [[왕징웨이]]가 조주를 통해 광동으로 돌아와 [[장제스]]와 회동하였으며 5월 9일, 산터우로 이동하여 쉬충즈를 만났다. 5월 13일 쉬충즈의 총사령부에서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장제스, [[바실리 블류헤르]]가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양시민과 류전환 제거를 위한 군사계획 수립을 도모했다.[* 동시에 왕징웨이는 랴오중카이와 결탁하여 자신의 집권을 위한 군부의 지지를 호소했다.] 쉬충즈는 양시민과 류전환을 군사적으로 제거하는 일에 대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왕징웨이의 설득으로 결심을 굳혔다. 동정군은 일단 조매를 포기하고 전군을 광동으로 회군시켜 양시민과 류전환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